취업 못해 창업…마스크팩으로 800억 `대박`
Article&thinking/IT 2011. 7. 24. 21:29 |취업 못해 창업…마스크팩으로 800억 `대박`
"대구에서 대학을 나온 후 서울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쳤습니다. 갑자기 불어닥친 IMF 때문에 취업에 실패하고 창업을 하게 됐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죠"
유현오(41·사진) 제닉 대표이사의 원래 꿈은 군수였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어머님을 찾아온 학부형 중 군수가 있었는데 차도 좋고 양복도 멋져서였다.
의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이유도 의사가 돼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덕망을 쌓아 지방자치단체장이 되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녹록치 않았다. 의대의 꿈은 좌절됐고 우여곡절 끝에 SCI(과학기술논문색인지수)에 수록되는 학술지에 논문을 3편이나 써내면서 한양대 박사과정까지 마쳤지만 1997년 졸업과 동시에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취업시장은 열리지 않았다.
연구소에서 월급 60만원을 받고 일용직과 다름없는 일을 하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군필 연구원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평소 긍정적이고 싹싹한 이미지였던 유 대표는 추천을 받고 KIST로 들어갔고 거기서 명문대학교 출신 인재들과 경쟁하면서 실력을 쌓아갔다.
약 1년이 지난후 한국에 처음 진출하는 한 외국계 기업에 취업했다. 유 대표가 처음으로 마스크팩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다. 창립멤버로 입사한 유 대표는 성실함을 무기로 높은 성과를 거둬 실력을 인정받고 결국 한국 지사의 대표이사가 됐다. 하지만 대표이사로 근무한 지 한달 만에 그만뒀다. 미국 본사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된 사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기업을 만든 유 대표는 고등학교 선배인 한 코스닥 상장사 대표이사를 찾아가 4억원을 투자받는데 성공했다. 이 돈으로 안산 공장을 임대했고 마스크팩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유 대표가 애초에 만들려 했던 제품은 습윤드레싱과 같은 약품이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높은 기술이 필요해 포기하고 마스크팩으로 선회했다.
유 대표가 마스크팩을 고안한 배경도 특이하다. 대학 시절 호주를 배낭여행하던 유 대표는 호주 내륙 열대지방에서 선크림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탓에 피부가 많이 상했다. 당시 화끈거리던 얼굴을 진정시키기 위해 물에 적신 수건을 얼굴에 덮고 쉬었는데 이때 어렴풋하게 마스크팩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처음 만든 제품은 병원 피부과에 납품했다. 필링처럼 피부가 상하는 시술을 받은 환자들의 피부에 마스크팩을 덮어줌으로써 안정시키고 빠른 회복을 돕는 제품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미국을 방문했고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본 유 대표는 현지 사무실을 내고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미국시장을 공략했고 서서히 점유율을 높였다.
한국 진출은 미국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들 때문에 시작했다. 미국에서 약국이나 마트를 들른 한국인들이 한국산 마스크팩 제품을 보고 문의를 해오기 시작하면서 한국으로 역수출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반응은 예상보다 별로였다. 아직 인지도가 낮은데다 OEM 제품이다 보니 판매업체들의 마케팅 의지도 낮았다.
이때 유 대표가 선택한 방법이 홈쇼핑이었다. 최은경 아나운서를 섭외해 제품을 팔았다. 홈쇼핑도 별 볼일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때 쯤 갑자기 매출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2006년도의 일이다.
난생 처음 대박을 친 그는 교만해졌다. 외제차를 탔고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는 항상 비용을 지불했다.
자연스레 회사 경영에도 신경을 못 쓰고 마케팅에만 의존했다. 서서히 나빠지던 회사 분위기는 2007년 19억원 적자로 이어졌다. 창사 이후 최대폭의 적자였다. 투자했던 지인들이 돈 없으면 주식이라도 내놓으라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초심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한 유 대표는 술을 끊고 매일 아침 5시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했다. 때마침 겔 타입 마스크팩 제품 개발이 완료됐다. 유 대표는 고민 끝에 깐깐한 이미지의 하유미씨를 섭외해 홈쇼핑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2008년 홈쇼핑 1회당 매출액은 1억5000만원 정도였는데 지난해에는 회당 3억원 이상을 벌어들였다.
이같은 대박에 힘입어 제닉의 매출액도 급증했다. 2006년 65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에는 820억원으로 늘었다.
양재동에 있는 제닉 사무실에는 `2006, 2007 잊지 말자`라는 표어가 여러군데 붙어있다. 교만해지지만 않으면 기업이 망할 일은 없다는 것이 유 대표의 지론이다.
유 대표는 화장품 산업이 전기전자를 잇는 한국의 기간산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중국에 따라잡힐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는 "피부에 닿는 제품이니까 중국산을 선호할 수가 없다"며 "미국과 유럽에서 한류가 통하는 지금은 한국 화장품을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제닉은 현재 `송승헌팩`으로 일본 홈쇼핑 시장에 진출했으며 가을에는 유럽 홈쇼핑 QVC에 진출할 방침이다.
패치를 적용할 수 있는 모든 분야가 제닉의 신사업이다. 현재 셀룰라이트 감소에 도움을 주는 패치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유 대표는 국내에 몇 안되는 패치 전문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윤 대표는 상장 후 제닉의 주식 131만주를 보유하게 된다. 공모가 2만2000원 기준 288억원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 유 대표는 IR담당 직원에게 전화를 해야만 했다. 그는 "내가 가진 지분의 가치에 신경을 쓰는 순간 경영은 뒷전이 될 수 밖에 없다"며 "어짜피 팔 주식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순우 기자]
기사 원문 : http://mnews.mk.co.kr/mnews_072408.html
인생이 굴곡있는 롤러코스터를 타며, 자신이 좌절할 시기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재기에 성공했다는 점이 너무 멋있었다.
2006년 2007년을 잊지말자라는 표어를 여기저기 붙여놓고 다닌다고 하는데,
과연 나에게 잊지 말아야 할 해는 언제일까?
솔직히 써놓고 싶은 순간은 고2시절부터니까 음.. 2005년부터.....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09년 2010년 2011년을 잊지 말자!" 이렇게 써야 겟지..??
더이상 잊지 말아야할 년도가 늘어나지 않았으면 좋겟다.
그리고 또 들었던 생각으로, 과연 내가 같은 상황이였으면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예전에는 끝까지 해보았다. 될 때까지라도 해보자라는 마인드로 늘 끝까지 최선을 다 하였다.
요즘은 아니다. 조금 안되겠다 싶으면 포기하고, 또 포기하고.. 자꾸 나약해지는 것 같다.
물론 그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따르긴 했지만, 뭐 핑계이므로 줄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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